020 『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


『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


왜 읽어야 하는가?

 책은 눈이다. 그것도 감겨있는 눈이 아니라, 늘 뜬 눈이다. 감고 있어서는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당연히, 알지 못하면 참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나는 예수의 기적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다. 불경하게도, 진짜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아니라, 무지한 대중을 앎의 세계로 이끈 삶을 신화화한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오늘은 눈멀게 하는 시대가. 디지털 혁명으로 일어나는 영상 문화의 압도적 위세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읽자고 하는 것은 결국 기적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예수 시대의 재현을 꿈꾸고 있다.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다가 퍼뜩 정신 들 때가 왕왕 있다. 책 좀 읽었다고 벌써 건방져 져서 글쓴이의 고뇌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질 때다. 그럴 적에는 책을 잠시 덮어 놓고 마음을 다스린다. 알면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몰라서 배우려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 물론, 모든 책을 진지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삶의 청량제 같은 책도 있는 법이고, 그런 유의 책은 편안하게 읽어도 된다. 그렇지만, 그런 예외가 너무 익숙해져 옛사람들이 책 읽을 적에 갖추었던 태도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참된 것을 얻고자 하면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마치 칼이 등 뒤에 있는 듯한 긴장감으로 읽어야 한다. 아, 언젠가 나는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영화를 보다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쏟아 붓는 돈을 생각하면 대중성을 추구 할 수밖에 없다. 딸린 식구도 많다. 아무리 분업화하고 전문화 했더라고 두루 챙겨야 한다. 누군가 영화감독이 공사판 감독과 다를 바 없다. 말한 적이 있는데, 수긍이 간다. 감독이 받아야 할 압박과 중압감은 상상을 넘어설 듯싶다. 그럼에도 주제와 내용을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 존경심마저 일어난다. 말이 좋아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추었다 하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영화감독들을 주목하고, 그들이 놀라운 성취를 이룬 동기가 무엇일까 톺아본 이유가. 결론은, 책읽기다. 능동적이고 비판적이며 창조적 책읽기. 책은 모든 문화의 거대한 뿌리다.

 산에 올라 능선을 바라보라. 내가 오른 산이 절로 높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저 아래 낮은 것에서 시작해서 다른 산줄기를 손잡고 다시 높아지고 이제 이 자리까지 이르는 것. 이 높이는 잠시 낮아졌다 저 멀리 보이는 곳으로 이어져 그것이 더 높은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한 개인은 난쟁이다. 살아 있는 동안 홀로 공부해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얼마나 높겠는가. 그러니까 거인의 무동을 차야 한다. 앞 세대가 이룬 빛나는 학문적 성취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보이는 새로운 지평이 있는 법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옛것을 익혀야 새것을 배울 수 있다. 법고창신이라, 옛것에 충실하되 새것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세월의 담금질을 이겨내고 여전히 빛나는 정신의 결정체로 남아있는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고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보라, 혁명전선에 뛰어든 체게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 않은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다시 말해 굉장히 천천히 읽는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
-앙드레 지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사회다. 무엇이든 빠르게 하는 것이 칭송받는 시대다. 책도 빨리 읽어야 한다. 숙제를 하거나 과제를 내야 하는데. 천천히 읽다가는 마감 시한 안에 일을 마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책장을 넘기는 손은 재빨라진다. 그러나 그렇게 읽고서야 어찌 책의 세계를 흠향 했다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빠르게 내달리면 옹호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데 필수사항이다. 조급하지 말자. 서두르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남의 길로 가지 말고 내 길로 가면 천천히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천천히 읽는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 세계는 강건하리니, 세상의 모진 풍파에 굳건히 맞설 수 있으리라.
인간의 지적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 이를 글로 적으려 했으니 말이다. 당초 이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백과사전은 불가능 했을 터다. 언어로 진리를 포획하려는 놀라운 기획. 그러나 잊지 말 것. 좋은 백관사전은 끊임없이 개정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항목을 설명한 내용도 바뀌고, 있던 항목을 지우거나 새로운 항목을 덧붙이기도 한다.

 인간의 지적 결과물에는 한계가 있다. 무조건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한낱 아류에 불과할 뿐. 의심하고 찾아보고 대조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미의 자궁 속에서 자라나나, 결국은 박차고 나오는게 생명의 순리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는 법이다.

 열린사회는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거꾸로, 닫힌 사회는 해석을 독점하려 든다. 한 권의 책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읽는 이의 처지가 다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에만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여론의 장에서 누구의 해석이 더 타당한지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설득력 높은 것으로 인정받은 해석이 가치 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책을 읽고 여럿이 토론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문화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행동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은 해석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기 때문이다.

 해석을 독점하고 다른 생각을 불온시한 시대에는 늘 분서가 저질러졌다. 진시황이 그러했고, 히틀러가 그러했다. 독서토론은 그런 불행을 막는 작은 몸짓이다.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가보다 책이 넘쳐나 바닥에도 책을 마구 쌓아 놓은 서가를 더 좋아한다. 얼핏 보면 무질서 하지만, 거기에는 서가의 주인이 정한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남은 알지 못하지만 자기만 아는 세계, 책을 즐겨 읽는 사람만이 누리는 복이다. 폐교가 생기는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그런 곳을 도서관이나 헌책방으로 만들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으면 싶었다. 근데, 먼저 실천한 이가 있는 모양이다.

 옛사람들의 만든 책을 볼라치면 경탄이 저절로 나온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인의 숨결이 느껴져서다. 하물며 책이라는 껍데기를 만드는 데도 그토록 큰 정성을 기울였으니, 내용을 쓰거나 옮겨 적은 사람들의 정성은 어떠했겠는가. 이에 반해 요즘 책들은 너무 대량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다. 오늘이라고 해서 어찌 옛것만 한 정성이 없겠냐. 만은 그래도 어딘가 비어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

 만드는 일이 기계화되고 대량화하더라고 읽는 일은 여전히 장인적이어야 하리라. 저자의 숨결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해하기는 욕망이 없고서는 책을 잘 읽었다 할 수 없다 책의 세계에 깊이 자맥질하면 비로소 만나는 값진 것이 있다. 자꾸 깊이 읽어 보라 권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준이 맞춰 읽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이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 단계 높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면 발전은 없다. 어려울 수고 있지만, 도전하는 과정에서 책읽기의 수준이 높아지기도 한다. 현 단계에 충실하면서고 세상의 일반적인 이치와 그리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마음에는 하늘 끝에 닿으려 하는, 달리 말하자면 바벨탑을 세우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 벽돌은  구워 쌓아올리느냐, 책으로 상징된 정신을 쌓으려 하냐만 다를 뿐. 그 욕망이 없다면 책을 읽을 리 없다. 생명과 우주의 섭리를 알아내려는 것은 발견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열망에는 권력의지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이다. 책으로 쌓는 바벨탑은 그래서 위험하다. 무조건 앎만 추구하는 삶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하는 파우스트다.
 앎의 궁극에 이르면서고 지배와 권력의 욕망을 경계할 줄 아는 것. 이 역성을 부여잡고 있을 적에 진정 책의 주인이 된다.

 책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꿈꾼다. 한 집의 주소는 그 집 서가에 주로 진열된 책의 특징을 알려 주는 것으로 정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정 만들기 어려우면 도서관에 쓰는 분류법을 차용하면 되니까. 그 마을에 학교를 하나 세우고 싶다. 오로지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을 써 보는 곳. 상상만 해도 행복한 마을. 그런데 요즘에는 욕심이 자꾸 생긴다. 상상에 그칠 일이 아니라 현실에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꿈꾸어야 한다. 더 이상 아파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더 이상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말이다. 이때 우리는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지리라. 상상의 날개를 달고 ‘비자’ 없이 금지된 곳으로 날아간다. 흥분되고 떨리는 시간이다. 한 권의 책은 미랠 이끈다.


호모부커스 독서법

천천히 읽어라.
천천히, 내용을 생각하며 읽는 책읽기는 비판적인 안목을 길러주며, 자기의 삶과 덧대어 책의 의미를 풍요롭게 펼쳐준다.

깊이 읽고 겹쳐 읽어라.
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며 지식을 깊게 하는 ‘깊이 읽기와’, 같은 주제를 각각 다른 분야에서 다룬 책들을 서로 비교하며 읽는 ‘겹쳐 읽기’를 하면 지식을 폭 넓고 깊게 만들 수 있다.

일고 토론하고 써라
책읽기는 ‘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시 글을 쓸 때 책읽기의 모든 과정이 완성된다. 이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비로소 책 읽기의 달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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